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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라 겐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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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노무라 겐지로는 일본의 전 프로 야구 선수이자 지도자로, 1989년부터 2005년까지 히로시마 도요 카프에서 선수로 활약했다. 그는 1988년 서울 올림픽 야구 국가대표로도 출전했으며, 통산 2020안타, 250도루를 기록했다. 선수 시절 최다 안타 2회, 도루왕 3회, 골든 글러브상 1회, 베스트 나인 3회를 수상했다. 2010년부터 2014년까지는 히로시마 도요 카프의 감독을 맡아 2013년 클라이맥스 시리즈에 진출시켰다. 2005년에는 2000안타를 달성하고 은퇴했으며, 이후 해설위원과 임시 코치를 거쳐 지도자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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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라 겐지로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2010년 5월 5일 요코하마 스타디움에서 노무라 겐지로
노무라 겐지로 (2010년 5월 5일, 요코하마 스타디움)
이름노무라 겐지로
원어 이름野村 謙二郎
로마자 표기Kenjiro Nomura
가나 표기のむら けんじろう
한자 표기野村 謙二郎
출생일1966년 9월 19일
출생지일본 오이타현 사이키시
신장176 cm
체중78 kg
포지션내야수 / 감독
투구우투
타석좌타
선수 경력
프로 입단 년도1988년
드래프트 순위1순위
첫 출장1989년 4월 9일
최종 출장2005년 10월 12일
히로시마 도요 카프(1989-2005)
감독 경력
히로시마 도요 카프 (2010-2014)
개인 기록 (NPB)
타율0.285
안타2020
타점765
도루250
홈런169
수상 내역
센트럴 리그 타격왕3회 (1991, 1994, 1995)
센트럴 리그 도루왕3회 (1990, 1991, 1994)
센트럴 리그 베스트 나인3회 (1991, 1995, 1996)
센트럴 리그 미쓰이 골든 글러브1회 (1995)
JCB,MEP 상2회 (1994, 1995)
IBM 올해의 선수상1회 (1995)
트리플 쓰리1회 (1995)
NPB 올스타8회 (1990, 1991, 1993–1998)
센트럴 리그 회장 특별상1회 (2005)
국가대표 경력
올림픽1988 서울 (시범종목)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1999 서울
메달
1988 서울 올림픽은메달
1999 서울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은메달

2. 선수 경력

히로시마 도요 카프에서 1989년부터 2005년까지 선수 생활을 했다. 프로 입단 전인 1988년에는 1988년 하계 올림픽 야구 종목에 일본 국가대표로 출전하여 은메달 획득에 기여했다.

프로 통산 17시즌 동안 뛰어난 활약을 펼쳤으며, 주요 기록 및 수상 내역은 다음과 같다.

주요 수상 및 기록
구분횟수연도
최다 안타2회1991년, 1994년
도루왕3회1990년, 1991년, 1994년
골든 글러브상 (유격수)1회1995년
베스트 나인 (유격수)3회1991년, 1995년, 1996년
트리플 쓰리1회1995년 (타율 .315, 32홈런, 30도루)



통산 성적
구분기록
안타2020
홈런169
타점765
도루250



2005년 6월 23일, 도토 대학 야구 연맹 출신 선수로는 사상 최초로 개인 통산 2000안타를 달성했으며[55], 이를 기념하여 히로시마현으로부터 현민 명예상을 받았다.[55] 같은 해 10월 12일 요코하마 베이스타스전을 끝으로 현역에서 은퇴했다. 2005년 은퇴와 함께 히로시마현 명예상을 수상했다.

2. 1. 프로 입단 전

1966년 9월 19일 오이타현 사에키시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 1학년 때 야구를 시작했으며,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투수를 맡았다고 알려졌으나[3], 노무라 본인은 2022년 인터뷰에서 야구를 시작한 이후 계속 유격수였다고 밝혔다.[4] 초등학교와 중학교에서는 최고 학년일 때 주장을 맡았다. 노무라의 숙부인 야기 다카시가 과거 히로시마 도요 카프 소속 프로야구 선수였기 때문에, 초등학교 시절부터 매년 히로시마의 스프링 캠프를 견학했다.[5] 주변의 기대를 받으며 항상 높은 목표를 가지고 연습했다고 한다.

오이타현립 사이키카쿠조 고등학교에 진학한 후, 빠른 발을 살리기 위해 우타자에서 양타자로 전향했다.[6] 고교 3학년 여름 오이타현 대회 준결승전에서 패배하여[7], 3년 동안 고시엔 대회에는 출전하지 못했다. 고등학교 동기로는 와카바야시 시게요시가 있다.

고마자와 대학에 진학하여 당시 감독 오타 마코토의 권유로 타자로 전향해 외야수가 되었다. 당시에는 엄격한 지도가 일반적이었으며, 1학년 때는 좌익수 또는 우익수로 리그전에 출전했다. 2학년 봄 리그전부터 중견수 주전 자리를 차지했고, 같은 해 가을 리그전에서는 처음으로 중견수 부문 베스트 나인에 선정되었다.[8] 3학년 봄 리그전에서는 오이시 다이지로(아시아 대학)가 보유했던 시즌 17도루 기록을 경신하는 18도루를 기록하며 2시즌 연속 베스트 나인에 선정되었다.[9] 또한 3학년 때 일미 대학 야구와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의 일본 대표로 선발되면서 프로 입단을 의식하기 시작했다. 가을 리그전에서는 2루수로도 출전하여 2루수 부문 베스트 나인에도 선정되었다.[10]

4학년 때는 주장을 맡았고, 다시 일미 대학 야구 일본 대표로 선발되었다. 봄 리그전에서는 도토 대학 야구 연맹 통산 도루 기록(52개)을 22년 만에 경신하며 고마자와 대학의 완전 우승에 기여했고, 만장일치로 최우수 선수(MVP)와 베스트 나인에 선정되었다.[11] 고마자와 대학 시절 팀 동료로는 니이타니 히로시(2년 선배), 다무라 쓰토무(1년 선배), 스즈키 히데유키(동기), 스즈키 노조미(1년 후배), 세키가와 고이치(2년 후배), 다케시타 준, 와카타베 겐이치(3년 후배) 등이 있었다.

4학년 때인 1988년에는 대한민국 서울에서 개최된 1988년 서울 올림픽에 오모리 다케시(게이오기주쿠 대학), 동기인 도마시노 겐지(주오 대학)와 함께 대학생 선수 3명 중 한 명으로 일본 대표팀에 선발되었다.[12] 도마시노와는 훗날 프로에서도 같은 팀에서 뛰게 된다. 올림픽에서는 주전 선수층이 두터워 주로 대타로 기용되었으며, 결승전을 포함한 3경기에서 9타수 2안타를 기록했다.[13] 미국과의 결승전에서는 경기 중반 대타로 출전하여 우타석에서[14] 우전 안타를 쳤지만, 역전 기회에서는 상대 투수 짐 애벗에게 막혔다.

대학 통산 성적은 아래와 같다.

구분내용
경기 수89
타율.317
타수325
안타103
홈런10
타점48
도루52
베스트 나인4회



봄 전일본대학야구선수권대회에는 3학년(1987년)과 4학년(1988년) 두 차례 출전했으나 각각 준결승과 2회전에서 탈락했다. 가을 메이지 진구 야구 대회에는 1학년(1985년)과 2학년(1986년) 두 차례 출전하여 2학년 때 준우승을 차지했다. 대학 야구계 최고의 야수 중 한 명으로 평가받으며[15], ‘이시게 히로미쓰 2세’라는 별명도 얻었다.[16]

1988년 프로야구 드래프트 회의에서는 여러 구단의 중복 지명이 예상되었으나, 결과적으로 히로시마 도요 카프가 단독 1순위로 지명했다. 히로시마는 같은 지역 출신인 가와사키 겐지로도 1순위 후보로 고려했지만, 스카우트들의 강력한 추천으로 노무라를 선택했다. 담당 스카우트는 와타나베 히데타케였으며, 계약금 6000만, 연봉 600만의 조건으로 입단 계약을 맺었다.[17] 등번호는 '''7'''번으로 결정되었다.

2. 2. 히로시마 도요 카프 시절 (1989년 ~ 2005년)

오이타현 사이키시 출신으로 고마자와 대학 시절 1988년 하계 올림픽 야구 일본 국가대표팀 선수로 발탁되어 유격수와 1번 타자로서 출전해 팀의 은메달 획득에 기여했다. 이후 1988년 프로 야구 드래프트 회의에서 히로시마 도요 카프로부터 1순위 지명을 받아 입단했다.
1989년: 입단 첫 해에는 스위치 히터로서 주로 대주자와 외야수로 활약하며 88경기에 출장해 21개의 도루를 기록했다. 4월 9일 한신 타이거스전(구 히로시마 시민 구장)에서 대주자로 1군에 첫 출전했고, 5월 4일 야쿠르트 스왈로스전에서는 6회말 나카모토 시게키로부터 1군 첫 안타인 중전 적시타를 쳤다. 이 해에는 대학 시절 경험이 있는 좌익수로 주로 뛰었다.
1990년: 프로 2년차부터는 전년도 오프 시즌에 롯데 오리온스로 이적한 다카하시 요시히코를 대신해 유격수 주전 자리를 꿰찼다. 시범 경기에서는 실책이 많았고[18] 체격에서 비롯되는 파워 부족에 대한 우려도 있었지만[19], 정규 시즌에 들어서자 공수 양면에서 활약했다. 4월 15일 요미우리 자이언츠전에서는 미야모토 가즈토모로부터 1군 첫 홈런인 우월 솔로 홈런을 기록했다. 또한, 올스타전에 처음으로 선출되어 2차전에서는 2번 타자 유격수로 선발 출전했다.[20] 시즌 33개의 도루를 기록하며 자신의 첫 타이틀인 도루왕을 차지했다.
1991년: 3번 타자로서 활약하며 시즌 132경기에 모두 출전했고, 31개의 도루를 기록해 2년 연속 도루왕 타이틀을 획득했다. 안타 부문에서는 170개의 시즌 최다 안타(양대 리그 1위)를 기록했고, 타율도 리그 4위인 .324를 기록하여 베스트 나인에 처음으로 선정되었다. 같은 해 팀은 센트럴 리그 우승을 차지했으며, 노무라는 팀 우승에 크게 기여하며 주축 선수로 성장했다. 9월 10일 주니치 드래곤즈전에서는 동점 적시타와 호수비를 선보이며 팀의 1위 등극과 리그 우승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이 경기를 현역 시절 가장 인상 깊었던 경기로 꼽았다.[21] 세이부 라이온스와의 일본 시리즈에서는 7차전에서 구도 기미야스에게 삼진을 당하며 마지막 타자가 되어 일본 시리즈 우승을 놓쳤지만, 팀 내 최고 타율인 .333을 기록하며 시리즈 우수 선수로 선정되었다. 이 해 연봉은 5300만(추정)으로 크게 올랐고,[22] 12월 7일에는 2년간 교제한 여성과 결혼했다.[23]
1992년: 미일 야구 일본 대표로 선발되었다.[24]
1993년: 14경기 연속 안타를 기록하며 4월에 처음으로 월간 MVP로 선정되었고,[25] 올스타전 2차전에서는 우수 선수상을 수상했다.[26] 그러나 시즌 타율은 .266으로 부진했다. 시즌 초반 3번 타자를 맡다가 6월 4일부터는 1번 타자로 기용되었다.
1994년: 이 해부터 7년간 히로시마의 주장과 팀 리더를 맡았고, 수위타자를 목표로 시즌에 임했다.[27] 시즌 초에는 2번 타자로 나섰으나 6월 9일부터 다시 1번 타자로 돌아와, 그해 신설된 최다 안타 타이틀(통산 2번째)과 통산 3번째 도루왕을 동시에 획득했다. 또한, 구단 유격수로는 1986년 다카하시 요시히코 이후 처음으로 풀 이닝 출전을 달성했다.[28] 연봉은 팀 동료 마에다 도모노리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4500만이 인상된 1.08억으로 처음 1억 엔을 돌파했다.[29][30] 11월에는 어금니 충치를 집중적으로 치료하여 치아 교합을 개선했고,[31] 몸쪽 공 대처 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그립 위치를 높이는 등 타격 자세를 수정했다.
1995년: 4월 18일 장남이 태어나자 헬멧에 아들의 이름을 적고 경기에 임했다.[32] 5월에는 개인 통산 두 번째 월간 MVP를 수상했다. 6월 3일 자이언츠전에서는 첫 등판한 가와하라 준이치를 상대로 1회 선두 타자 홈런을 쳤다.[33] 9월 1일까지 전 경기 1번 타자로 선발 출전하다가 이후 3번 타자로 고정되었다. 9월 22일에는 당시 역대 5위에 해당하는 빠른 기록인 857경기 만에 개인 통산 1,000안타를 달성했다. 시즌 후반에는 허리와 등 부상으로 도루 수가 줄었지만,[34] 10월 6일 야쿠르트전에서 30도루를 채우며 일본 프로 야구 사상 6번째로 트리플 쓰리(타율 .315, 32홈런, 30도루)를 달성했다. 타율 .3145는 로버트 로즈의 .3150에 근소한 차이로 리그 3위였고, 32홈런은 팀 동료 에토 아키라에 이어 리그 2위였다. 수비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아 처음으로 골든 글러브상을 수상했다. 시즌 종료 후 당시 역대 최고액인 1.7억에 계약을 갱신했으며, 이는 5년 뒤 김본 토모아키가 기록을 경신할 때까지 팀 내 최고 연봉으로 남는 불문율이 되었다.[35] 구단은 계약 갱신 시 주장 및 팀 리더로서의 활약과 다카쓰 신고, 니시야마 가즈히로 등 라이벌 팀 마무리 투수들을 상대로 끝내기 안타를 친 점 등을 높이 평가하여 팀 내 최고 기여도를 인정했다.[36]
1996년: 개막 후 7경기 동안 1번 타자로 기용되었으나, 전년도 도루왕 오가타 고이치의 존재로 4월 중순부터는 주로 3번 타자를 맡았다. 7월 6일 야쿠르트전에서 2루 도루를 시도하다 왼쪽 발목을 심하게 다쳐 들것에 실려 나갔고, 다음날부터 3경기에 결장했다.[37] 골절이 의심될 정도였으나 구단은 염좌로 발표했고, 노무라는 진통제를 맞으며 출전을 강행했다.[38] 당시 감독 미무라 도시유키는 휴식을 권유했지만, 대체 유격수 부재와 노무라 본인의 강력한 출전 의지로 인해 경기에 계속 나섰다.[38] 그러나 왼쪽 발목을 보호하려다 보니 양쪽 허벅지와 종아리까지 통증이 번져 9월에는 전력 질주가 불가능한 상태가 되었다.[38] 팀 성적도 노무라의 부상 이후 급격히 하락(부상 전 45승 24패 → 이후 26승 35패)했고, 이는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메이크 드라마를 허용한 원인 중 하나로 지적되기도 한다.[38] 부상으로 개인 성적은 부진했지만, 팀을 이끈 리더십을 인정받아 연봉은 2000만 인상된 1.9억에 계약했고, 선수회장에도 취임했다.[39]
1997년: 오프 시즌에 FA 자격을 얻었다. 여러 팀 감독들이 유격수 후계자로 노무라 영입을 원했으며,[40]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탬파베이 레이스로부터도 영입 제안을 받았다.[41] 노무라 자신도 오랫동안 메이저리그 진출을 꿈꿔왔지만,[42] 대학 시절 은사인 오타 아키라 감독의 조언("네 인생이다. 다만 히로시마와 일본 프로야구계를 위해 사는 것도 인생이다")을 듣고 히로시마 잔류를 결정했다.[43] 이로써 그는 일본인 선수로는 13번째, 히로시마 구단 최초로 연봉 2억 선수가 되었다.
1998년: 서울 올림픽 대표팀 동료였던 도마시노 겐지가 야쿠르트에서 이적해 와 팀 동료가 되었다. 도마시노의 합류는 노무라에게 자극이 되어 기량 향상에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이 해에는 주로 1번 타자로 활약하며 팀에서 유일하게 전 경기에 출전했지만, 연봉은 동결되었다.[44]
1999년: 5월 19일에는 당시 역대 4위에 해당하는 빠른 기록인 1289경기 만에 통산 1500안타를 달성했다. 9월에는 올림픽 아시아 최종 예선 일본 대표로 선발되었으나, 이 해 고관절 부상으로 5월부터 결장이 잦아졌고 시즌 중반에는 3루수나 2루수로 선발 출전하는 빈도가 늘었다. 8월부터 다시 유격수로 복귀했지만, 이후 잦은 부상에 시달리게 된다.
2000년: 3루수 에토 아키라가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이적하면서 그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3루수에 도전했다. 그러나 4월 8일 한신전에서 1루로 달리던 중 왼쪽 무릎 뒤쪽 근육이 파열(실제로는 근단열[45])되어 전치 3주 진단을 받았다.[46] 5월 3일 1군에 복귀했지만 상태가 호전되지 않았고, 7월 24일 정밀 검사 결과 왼쪽 다리 근력이 오른쪽의 절반 수준까지 떨어진 것이 확인되어 처음으로 1군 엔트리에서 말소되었고 후반기 시즌을 뛰지 못했다.[46] 8월에는 부상 중이던 마에다 도모노리, 오가타 고이치와 함께 미국 피츠버그로 건너가 재활에 전념했다. 이 해는 프로 데뷔 후 최저인 타율 .240, 2홈런, 1도루에 그쳤다.
2001년: 노무라가 전력에서 이탈한 사이 유격수 자리에는 히가시데 아키히로, 3루수 자리에는 아라이 다카히로가 주전으로 자리 잡았다. 이에 노무라는 2루수로 전향하여 기무라 다쿠야와 주전 경쟁을 벌이게 되었다. 개막 전 캠프 중인 2월 8일 수비 훈련 도중 왼쪽 허벅지를 다쳐 시범 경기는 2경기 출전에 그쳤고, 데뷔 후 처음으로 개막전에 결장했다. 같은 2루수 포지션의 에디 디아즈가 타격에서 좋은 모습을 보였고, 오가타 고이치의 부상으로 아라이 다카히로가 우익수로 이동하면서 5월 9일부터 노무라는 다시 3루수 주전 자리를 확보했다.
2002년: 4월 말 오른쪽 허벅지 부상으로 약 1개월간 2군에 머물렀다. 후반기에는 주로 대타나 수비 강화 요원으로 기용되면서 출전 경기 수가 100경기 미만이었고 타율도 .211로 부진했다.[47] 그럼에도 유격수 경쟁자인 히가시데 아키히로에게 수비 등에 관한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48]
2003년: 3월 29일 야쿠르트전 수비 도중 왼쪽 내복사근 부상(전치 3주)을 입어 4월 2일 1군 엔트리에서 말소되었다.[49] 시즌 막판에는 오른쪽 허벅지 통증까지 겹쳐 결장 기간이 길었고, 시즌 종료 후에는 야구 협약 상한선을 넘는 33% 감봉된 1억에 계약을 갱신했다.[49] 한편, 같은 해 7월 야마모토 고지 감독의 연임이 결정되었을 때, 구단주 마쓰다 하지메는 노무라를 차기 감독 후보로 염두에 두고 있음을 공개적으로 밝혔다.

타격 연습을 하는 노무라(2004년 개막 전 캠프)

2004년: 1월 구로다 히로키와 함께 미국 애리조나에서 자율 훈련을 실시하여 부상 방지를 위한 심부근 강화와 고관절 유연성 향상 등에 노력했지만,[50] 6월 19일 야쿠르트전에서 3루 땅볼을 처리하다 오른쪽 무릎을 다쳐 1군 엔트리에서 말소되는 등 이 해에도 부상에 시달렸다. 연말에는 현상 유지로 계약을 갱신했다.[51]
2005년: 나이에 따른 체력 저하와 수비 부담 경감을 위해 1루수에도 도전하기 시작했고, 개막 전 캠프 연습 경기에서는 포수도 맡았다. 같은 해 1월부터 통산 2000안타 달성에 대한 주변의 기대가 높아졌다. 5월에는 고향인 오이타현 사이키시 내 6곳[52]과 소고 히로시마점(そごう広島店)에 카운트다운 보드가 설치되었고,[53] 6월에는 히로시마 가스(広島ガス) 인포메이션 플라자에서 입단 이후의 발자취를 되짚어보는 사진전이 개최되었다.[54] 2000안타까지 4개를 남겨둔 6월 21일부터의 홈 6연전 기간에는 오이타현 사이키시의 오테마에 공원(大手前公園)에서 250인치 야외 스크린으로 퍼블릭 뷰잉이 실시되었다.[54] 6월 23일 야쿠르트전(구 히로시마 시민 구장) 4회말 가와시마 료로부터 통산 2000안타를 달성했다. 이는 도토 대학 야구 연맹 출신 선수로는 사상 최초의 기록이었다.[55] 이를 기념하여 히로시마현으로부터 현민 명예상이 수여되었고,[55] 히로시마 전철이 기념 파세오 카드(パセオカード)를 발행했다.[56] 이후 대타로서의 출전이 많아졌고, 9월 16일 시즌 종료 후 현역 은퇴를 표명했다. 시즌 최종전인 10월 12일 요코하마 베이스타스전이 은퇴 경기가 되었고, 만원 관중에게 노무라의 등번호 "7"이 새겨진 포스터가 배포되었다. 은퇴 경기에서는 1번 타자 유격수로 선발 출전했지만, 경기 도중에는 대학 시절 수비 경험이 있는 중견수로 이동하기도 했다.[57] 은퇴식 연설에서 "오늘 모인 아이들아, 야구는 좋은 것이다. 야구는 재밌다!"라는 말을 남겼다.[58] 구단은 등번호 "7"을 영구 결번으로 지정할 것을 제안했지만, 노무라 본인이 이를 사양하여 등번호 "7"에 어울리는 선수가 나올 때까지 영구 결번 보류(永久欠番預かり) 상태가 되었다.[59] 그 결과, 2013년부터 도바야시 쇼타가 등번호 "7"을 이어받게 되었다. 또한, 구단 간부는 이 시점에서 2009년 마즈다 줌줌 스타디움 히로시마 개장에 맞춰 노무라를 감독으로 영입할 방침을 내비쳤다.

3. 지도자 경력

선수 은퇴 후에는 2006년부터 히로시마 TV 방송, 닛폰 TV, 스포츠 닛폰 등에서 야구 해설가 및 평론가로 활동했으며, 2007년 히로시마[60]2008년 캔자스시티 로열스[61]에서 임시 코치를 맡기도 했다.

2010년부터 2014년까지 5시즌 동안 히로시마 도요 카프의 감독을 역임하며 팀을 이끌었고, 2013년2014년에는 팀을 클라이맥스 시리즈로 이끌었다.[78] 감독 퇴임 후에는 다시 야구 해설가 및 평론가로 복귀했으며, 2015년에는 보스턴 레드삭스의 스프링 캠프 임시 코치를 맡기도 했다.[81] 이후 히로시마 대학 대학원에서 교육학을 전공하여 박사 과정 전기를 수료했고, 2022년에는 히로시마 대학 스포츠 센터 객원 교수로 임명되었다.

3. 1. 히로시마 도요 카프 감독 (2010년 ~ 2014년)

선수 은퇴 후 2006년부터 2009년까지 히로시마 TV 방송, 닛폰 TV, 스포츠 닛폰에서 야구 해설 위원으로 활동했다. 2007년에는 친정팀 히로시마 도요 카프의 춘계 캠프에서 임시 코치를 맡기도 했다. 2009년 시즌 종료 후, 2010년부터 히로시마 도요 카프의 감독으로 정식 취임하여 2014년까지 팀을 이끌었다.

감독 취임 당시 히로시마는 11년 연속 B클래스(4위 이하)에 머물러 있었다. 노무라는 감독·코치 경력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NPB 감독으로서는 비교적 저렴한 연봉으로 계약했다.[64] 이는 전임 감독 마티 브라운의 연봉(40만달러)[65]보다는 높은 금액이었다. 취임 기자회견에서 노무라는 "우승을 목표로 합니다. 선수들도 그런 마음가짐으로, A클래스를 목표로 한다는 말은 그만둬 주십시오"라고 포부를 밝혔고,[66] 강연회에서는 "우승하면 '평범한 일을 했을 뿐입니다'라고 말할 생각입니다"[67]라고 선언하며 강한 의지를 보였다.

=== 2010년 ===

부임 첫 해, 전년도 부진했던 범 영심, 광세 준과 시범 경기에서 활약한 아마야 소이치로, 그리고 노무라 자신이 미국 연수 시절 눈여겨보았던 저스틴 휴버를 주전으로 기용했다. 범 영심과 광세 준은 좋은 성적을 거두었으나, 장타를 기대했던 아마야와 휴버는 부진했다.[68] 시즌 동안 선발 라인업을 95가지나 바꾸는 등 타선을 고정하지 못했다. 팀 희생 번트는 구단 역사상 가장 많은 140개를 기록했고, 팀 도루는 119개로 최근 15년 중 가장 많아 기동력이 향상되었다. 경기당 평균 득점도 4.1점으로 5년 만에 3점대에서 벗어났다. 수비에서도 팀 실책 수가 전년도 리그 최하위(100개)에서 3위(82개)로 개선되었다.[69]

하지만 투수진 운영에서는 어려움을 겪었다. 콜비 루이스가 전년 12월 갑작스럽게 팀을 떠났고, 개막 전 캠프와 시즌 초반 오타케 히로시, 요코야마 류지, 마이크 슐츠, 나가카와 카츠히로 등 주력 투수들의 부상이 이어졌다. 특히 오타케의 경우, 부상 복귀를 서두르다 재부상을 당하게 해 선수 관리 능력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었다.[70] 중간 계투진 운용 방식에도 의문이 제기되었다.[71] 에이스 마에다 켄타는 팀 역사상 최초로 투수 3관왕을 달성했지만,[72] 팀 평균자책점은 전년도 3.59에서 4.80으로 크게 나빠졌고, 마에다를 제외하면 5.33에 달했다. 이는 5년 만의 4점대 후반 평균자책점이었으며, 악화 폭(1.21)은 구단 역사상 가장 컸다. 실점(737점, 162점 증가), 사사구(524개, 137개 증가), 피홈런(171개, 54개 증가) 역시 모두 큰 폭으로 늘어나 "구단 사상 최악의 '투수력 후퇴'"라는 평가를 받았다.[73]

최종 성적은 58승 84패 2무로 리그 5위에 머물렀다. 이는 팀 역사상 두 번째로 많은 패배 기록이었다. 시즌 후 노무라는 부진했던 투수진 강화를 위해 추계 캠프에서 강도 높은 훈련을 예고하며 다음 시즌을 기약했다.[74] 12월 7일,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 후보자 명부 선수 부문에 이름을 올렸다.[75]

=== 2011년 ===

9월 초까지 A클래스 진입 경쟁을 벌였으나 이후 급격히 무너지며 전년과 같은 리그 5위(60승 76패 8무)로 시즌을 마감했다. 특히 센트럴·퍼시픽 교류전에서는 10연패를 당했고, 이 기간 동안 50이닝 연속 무득점이라는 교류전 최악의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6월 26일 주니치 드래건스와의 경기에서는 3회말 나카무라 쿄헤이의 땅볼 판정에 항의하다 심판에게 폭력을 행사하여 퇴장당했다.[76] 다음 날, 가토 료조 커미셔너로부터 2경기 출장 정지 처분을 받았고, 이 기간 동안에는 고 신지가 감독 대행을 맡았다.

=== 2012년 ===

시즌 전반기에는 한신 타이거스의 부진 덕분에 1997년 이후 15년 만에 A클래스(3위)로 마쳤다. 그러나 9월 들어 8연패를 포함해 6승 17패 1무로 크게 부진하며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와의 3위 경쟁에서 밀려나 최종 4위(61승 71패 12무)에 그쳤다. 이로써 팀은 15년 연속 B클래스를 기록하게 되었다.

=== 2013년 ===

계속해서 팀을 지휘하며 4년 연속으로 정규 시즌에서 패수가 승수보다 많았지만, 69승 72패 3무로 리그 3위를 기록하며 1997년 이후 16년 만에 팀을 A클래스로 이끌었다. 이는 히로시마 구단 역사상 첫 클라이맥스 시리즈 진출이었다. 포스트시즌에서는 퍼스트 스테이지에서 리그 2위 한신 타이거스를 상대로 2연승을 거두며 파이널 스테이지에 진출했으나, 파이널 스테이지에서 리그 1위 요미우리 자이언츠에게 어드밴티지 1패를 포함해 4연패(0승 3패)하며 일본 시리즈 진출에는 실패했다.

=== 2014년 ===

2년 연속으로 요미우리, 한신과 우승 경쟁을 벌였다. 9월 26일 히로시마가 한신에게 패배하면서 요미우리의 우승이 확정되었지만, 동시에 히로시마는 2년 연속 클라이맥스 시리즈 진출을 확정했다.[78] 한신과 치열한 2위 다툼을 벌였으나, 시즌 최종전인 10월 6일 요미우리전에서 패배하며 3위(74승 68패 2무)가 확정되었다.[79] 시즌 종료 후인 10월 8일, 구단에 감독직 사임 의사를 밝혔고 이는 수용되었다. 노무라는 진출이 확정된 클라이맥스 시리즈까지만 팀을 지휘하고 감독직에서 물러났다.[80] 이 해 기록한 74승은 히로시마 구단 역사상 두 번째로 많은 승수였다. 포스트시즌에서는 퍼스트 스테이지에서 한신 타이거스를 만나 1무 1패로 탈락했다. 특히 2차전은 연장 12회초 종료 시점에 스테이지 승자가 확정됨에 따라 경기가 중단되는 규정이 처음으로 적용된 사례가 되었다.[100]

=== 감독 스타일 및 평가 ===

노무라는 선수 시절 경험을 바탕으로 히로시마의 전통인 "달리는 빨간 모자 야구"를 표방했다. 발 빠른 선수들을 적극적으로 상위 타선에 배치하여 팀 도루 수를 크게 늘렸으며, 브래드 에르드레드 등 외국인 선수들과의 원활한 소통 능력은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88]

하지만 상대 투수의 좌우 유형에 따라 타순을 대폭 변경하는 이른바 "좌우병(左右病)" 기용은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89] 이러한 경향은 예고 선발 제도가 도입된 2012년 이후 더욱 두드러졌으며, 상대 투수와의 상성이나 선수 컨디션과 무관하게 기계적으로 적용되는 경우가 많아 타선이 고정되지 못한다는 지적이 꾸준히 제기되었다.

=== 감독 시절 통산 성적 ===

; 정규 시즌

년도구단순위경기승리패전무승부승률게임차홈런타율평균자책점연령
2010히로시마5위14458842.40821.5104.2634.8044세
20115위14460768.44116.052.2453.2245세
20124위144617112.46226.576.2332.7246세
20133위14469723.48917.0110.2483.4647세
20143위14474682.5217.5153.2723.7948세
합계: 5년71832237127.465A클래스 2회, B클래스 3회



; 포스트시즌

년도구단대회명상대승패
2013히로시마센트럴 리그
클라이맥스 시리즈

1단계
한신 타이거스(센트럴 리그 2위)2승 0패=2단계 진출
센트럴 리그
클라이맥스 시리즈
2단계
요미우리 자이언츠(센트럴 리그 1위)0승 4패=탈락
(※1)
2014센트럴 리그
클라이맥스 시리즈

1단계
한신 타이거스(센트럴 리그 2위)0승 1패 1무=탈락
(※2)



: ※ 승패의 '''굵은 글씨'''는 승리한 시리즈

: ※1 2단계는 상대팀의 어드밴티지 1승을 포함하여, 0승 4패로 탈락.

: ※2 2차전은 전년 제정된 12회 초 종료 시점에서 스테이지 승자 확정에 의한 중단 규정이 처음으로 적용되어[100], 1패 1무로 탈락.

3. 2. 기타 경력

선수 은퇴 후 2006년부터 2009년까지 히로시마 TV 방송, 닛폰 TV, 스포츠 닛폰에서 야구 해설가 및 평론가로 활동했다.[60] 2007년 춘계 캠프에서는 친정팀 히로시마 도요 카프의 임시 코치를 맡아 수비와 주루를 지도했다.[60]

2008년에는 캔자스시티 로열스의 개막 전 캠프에 시라이 카즈유키와 함께 임시 코치로 초청받았으며,[61] 같은 해 베이징 올림픽 야구 경기에서는 재팬 컨소시엄 중계 해설자로 참여했다.[62] 10월에는 제2회 WBC 일본 대표팀 감독 선정 회의에 젊은 세대를 대표하여 참석했으나,[62] 최종적으로는 하라 다츠노리가 감독으로 선임되었다.[63]

2010년부터 2014년까지 히로시마 도요 카프 감독을 맡았다. 감독 퇴임 후 다시 닛폰 TV히로시마 TV의 야구 해설자, 스포츠 닛폰의 야구 평론가로 복귀했다.

2015년 2월에는 보스턴 레드삭스의 제안을 받아 스프링 캠프 임시 코치로 활동했다.[81]

2017년 4월 히로시마 대학 대학원 교육학 연구과(사회인 특별 선발)에 입학하여 교육학(건강 스포츠 교육학 전문)을 전공했고, 2019년 3월 박사 과정 전기를 수료했다.

현재 일본 프로 야구 명구회 부이사장을 맡고 있으며,[1] 2022년 6월에는 히로시마 대학 스포츠 센터 객원 교수로 임명되었다.

4. 선수 및 지도자로서의 특징

노무라는 선수 시절 뛰어난 타격, 주루, 수비 능력을 갖춘 선수였다. 최다 안타 3회, 최다 득점 2회, 트리플 쓰리 달성, 통산 2000안타 등 화려한 기록을 남겼으며, 특히 히로시마 도요 카프의 리드오프로서 팀 공격의 핵심 역할을 수행했다. 작은 체구에도 불구하고 꾸준한 훈련을 통해 힘을 길러 트리플 쓰리를 달성했고, 유격수로서 높은 통산 타율(.293)을 기록하며 강타 유격수로 평가받았다. 초구부터 적극적으로 공격하는 과감한 타격 스타일을 보였고,[82]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의 영향을 받아 역동적인 플레이를 추구했다.[83]

대학 시절부터 두각을 나타낸 빠른 발은 프로에서도 큰 무기였다.[84] 프로 통산 3번의 도루왕을 차지하며 리그를 대표하는 준족으로 활약했다.[85] 입단 초기 10년간 234개의 도루와 42개의 3루타를 기록했으나, 선수 생활 후반에는 잦은 부상으로 인해 주력이 감소하여 대주자로 교체되는 경우가 많아졌다.

수비에서는 프로 2년 차부터 유격수로 자리 잡았다. 동료와의 연계 플레이를 중시했으며, 히로시마 시민 구장의 흙 그라운드 특성상 불규칙 바운드에 대비하여 안정적인 포구를 위해 노력했다.[86] 스스로 어깨가 강하지 않다고 판단하여 송구 능력 향상에 힘썼고, 수비 범위를 나타내는 레인지 팩터에서 여러 차례 리그 상위권에 오르는 등 뛰어난 수비 능력을 보여주었다.[87] 글러브에 대한 애착이 강해 오랫동안 같은 모델을 사용했으며, 이는 후배 선수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4. 1. 선수 시절

오이타현 사이키시 출신으로 고마자와 대학 재학 중이던 1988년 하계 올림픽에 일본 국가대표팀 선수로 발탁되어 유격수 겸 1번 타자로 출전, 팀의 은메달 획득에 기여했다. 이후 1988년 프로 야구 드래프트 회의에서 히로시마 도요 카프로부터 1순위 지명을 받아 입단했다. 입단 당시에는 스위치 히터였으나 프로에서는 좌타자로 전향했으며, 주로 대주자외야수로 활동하며 88경기에 출장해 21개의 도루를 기록했다.

1989년 4월 9일 한신 타이거스전(히로시마 시민 구장)에서 대주자로 1군에 데뷔했고, 같은 해 5월 4일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전에서는 6회말 나카모토 시게키로부터 1군 첫 안타인 중전 적시타를 쳤다. 이 해에는 대학 시절 경험이 있던 좌익수로 주로 뛰었다.

1990년부터는 전년도 오프 시즌에 지바 롯데 마린스로 이적한 타카하시 케이이치의 뒤를 이어 유격수 주전 자리를 차지했다. 시범 경기에서는 실책이 잦았고[18] 당시 공표 체중 70kg보다 마른 체격으로 인한 파워 부족[19]에 대한 우려도 있었으나, 시즌 개막 후 공수 양면에서 활약했다. 4월 15일 요미우리 자이언츠전에서는 3회말 미야모토 카즈토모로부터 1군 첫 홈런인 우월 솔로 홈런을 기록했다. 같은 해 올스타전에 처음으로 선출되어 2차전에서는 2번 유격수로 선발 출전했다.[20] 시즌 33개의 도루를 기록하며 생애 첫 타이틀인 도루왕을 차지했다.

1991년에는 전 경기에 출전하며 31도루로 2년 연속 도루왕 타이틀을 획득했다. 또한 170안타로 최다 안타 타이틀을 차지했고, 타율 .324로 리그 4위에 오르며 처음으로 베스트 나인에 선정되었다. 팀의 센트럴 리그 우승에 크게 기여하며 주축 선수로 성장했다. 9월 10일 주니치 드래곤스전에서는 동점 적시타와 호수비를 선보이며 팀의 리그 1위 등극 및 우승 확정에 기여했는데, 노무라 본인은 이 경기를 현역 시절 가장 인상 깊었던 경기로 꼽았다.[21]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스와의 일본 시리즈에서는 7차전 마지막 타자가 되어 삼진(상대 투수: 구도 기미야스)으로 물러나며 우승을 놓쳤지만, 팀 내 최고 타율인 .333를 기록하며 시리즈 우수 선수로 선정되었다. 이 해 연봉은 5300만(추정)으로 인상되었고,[22] 12월 7일에는 2년간 교제한 여성과 결혼했다.[23]

1992년에는 미일 프로야구 일본 대표로 선발되었다.[24] 1993년에는 14경기 연속 안타를 기록하는 등 활약하며 4월에 생애 첫 월간 MVP로 선정되었고,[25] 올스타전 2차전에서는 우수 선수상을 수상했다.[26] 그러나 시즌 타율은 .266으로 다소 부진했다.

1994년부터 7년간 히로시마의 주장을 맡았다. 시즌 전 수위타자를 목표로 선언하고 시즌에 임했으며,[27] 시즌 초반 2번 타자로 나서다 6월 9일부터 다시 1번 타자로 복귀하여 두 번째 최다 안타와 세 번째 도루왕 타이틀을 획득했다. 또한 구단 유격수로는 1986년 타카하시 케이이치 이후 처음으로 풀 이닝 출전을 달성했다.[28] 연봉은 팀 동료 마에다 도모노리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4500만 인상된 1.08억으로 처음 1억 엔을 돌파했다.[29][30] 11월에는 추계 캠프 참가를 면제받고 어금니 충치를 집중 치료하여 타격 시 힘을 싣는 데 도움이 되는 교합 개선 효과를 보았다.[31] 또한, 몸쪽 공 대처 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그립 위치를 높이고 강하게 스윙하는 타격폼으로 수정했다.

1995년 4월 18일 장남이 태어났고, 헬멧에 아들의 이름을 적고 경기에 임했다.[32] 5월에는 두 번째 월간 MVP를 수상했다. 9월 1일까지 전 경기 1번 타자로 선발 출전하다가 9월 2일부터는 3번 타자로 고정되었다. 9월 22일에는 당시 역대 5위의 빠른 기록인 857경기 만에 개인 통산 1,000안타를 달성했다. 시즌 후반에는 허리와 등 통증으로 인해 도루 수가 줄었지만,[34] 10월 6일 야쿠르트전에서 30도루를 채우며 일본 프로 야구 사상 6번째 트리플 쓰리(타율 .315, 32홈런, 30도루)를 달성했다. 타율 .3145는 로버트 로즈(.3150)에 이어 리그 3위였고, 32홈런은 팀 동료 에토 아키라에 이어 리그 2위였다. 수비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아 처음으로 골든 글러브상을 수상했다. 연말에는 당시 역대 최고액인 1.7억에 계약을 갱신하며 팀 내 최고 연봉자가 되었고, 이는 5년 후 가네모토 도모아키가 기록을 경신할 때까지 이어졌다.[35][36]

1996년에는 개막 후 7경기 동안 1번 타자로 기용되었으나, 전년도 도루왕 오가타 고이치의 존재로 인해 4월 중순부터는 주로 3번 타자를 맡았다. 7월 6일 야쿠르트전에서 2루 도루를 시도하다 왼쪽 발목을 다쳐 들것에 실려 나갔고, 다음 날부터 3경기에 결장했다.[37] 골절이 의심될 정도로 심각한 부상이었으나 구단은 염좌로 발표했고, 노무라는 진통제를 맞으며 출전을 강행했다.[38] 미무라 도시유키 감독은 휴식을 권유했지만, 대체 유격수 부재와 노무라 본인의 출전 의지가 강해 경기에 계속 나섰다.[38] 그러나 왼쪽 발목을 보호하려다 양쪽 허벅지와 종아리까지 통증이 번졌고, 9월에는 전력 질주가 불가능한 상태가 되었다.[38] 팀 성적도 노무라 부상 전 45승 24패에서 이후 26승 35패로 급락했는데, 이 부상이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메이크 드라마' 역전 우승을 허용한 원인 중 하나로 지목되기도 한다.[38] 부상으로 개인 성적은 부진했지만, 팀을 이끈 공로를 인정받아 연봉은 2000만 인상된 1.9억에 계약했고, 선수회장에도 취임했다.[39]

1997년 오프 시즌에 FA 자격을 얻었다. 여러 팀 감독들이 유격수 후계자로 노무라 영입을 원했으며,[40]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탬파베이 레이스로부터도 영입 제안을 받았다.[41] 노무라 자신도 오랫동안 메이저리그 진출을 꿈꿨지만,[42] 대학 시절 은사인 오타 감독의 조언("네 인생이다. 다만 히로시마와 일본 프로야구계를 위해 사는 것도 인생이다")[43]을 듣고 히로시마 잔류를 결정, 일본인 선수로는 13번째이자 구단 최초로 연봉 2억 선수가 되었다.

1998년에는 서울 올림픽 대표팀 동료였던 도마시노 세이지가 야쿠르트에서 이적해 와 한솥밥을 먹게 되었다. 도마시노의 존재는 노무라에게 자극제가 되었다고 한다. 이 해에는 주로 1번 타자로 활약하며 팀에서 유일하게 전 경기에 출전했지만, 연봉은 동결되었다.[44] 1999년 5월 19일에는 당시 역대 4위의 빠른 기록인 1289경기 만에 통산 1,500안타를 달성했다. 그러나 9월 올림픽 아시아 최종 예선 일본 대표로 선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고관절 부상으로 인해 5월부터 결장이 잦아졌고 시즌 중반에는 3루수2루수로 선발 출전하는 경우가 늘었다. 8월부터 다시 유격수로 복귀했지만, 이후 잦은 부상에 시달리게 되었다.

2000년에는 3루수 에토 아키라가 요미우리로 이적하자 그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캠프부터 3루수 훈련을 시작했다. 하지만 4월 8일 한신전에서 1루로 달리던 중 왼쪽 무릎 뒤쪽 근육이 파열(실제로는 근단열[45])되는 부상을 입어 전치 3주 진단을 받았다.[46] 5월 3일 1군에 복귀했으나 상태가 호전되지 않았고, 7월 24일 정밀 검사 결과 왼쪽 다리 근력이 오른쪽의 절반 수준으로 떨어진 것이 확인되어 처음으로 1군 엔트리에서 말소, 남은 시즌을 뛰지 못했다.[46] 8월에는 마찬가지로 부상 중이던 마에다 도모노리, 오가타 고이치와 함께 미국 피츠버그로 건너가 재활에 전념했다. 이 해 성적은 프로 데뷔 후 최저인 타율 .240, 2홈런, 1도루에 그쳤다.

2001년, 노무라가 자리를 비운 사이 유격수에는 히가시데 아키히로, 3루수에는 아라이 다카히로가 주전 자리를 굳혔다. 이에 노무라는 2루수로 전향하여 기무라 다쿠야와 주전 경쟁을 벌였다. 그러나 캠프 중인 2월 8일 수비 훈련 중 왼쪽 허벅지를 다쳐 시범 경기에 2경기만 출전했고, 데뷔 후 처음으로 개막전에 결장했다. 같은 2루수 경쟁자 에디 디아스의 타격이 좋았던 반면, 오가타의 부상으로 아라이가 우익수로 이동하면서 5월 9일 이후 노무라는 다시 3루수 주전 자리를 확보했다.

2002년 4월 말 오른쪽 허벅지 부상으로 약 1개월간 2군에 머물렀고, 후반기에는 대타나 수비 강화 요원으로 주로 기용되며 출전 경기 수가 100경기 미만으로 줄었고 타율도 .211로 부진했다.[47] 하지만 유격수 경쟁자인 히가시데에게 수비 등에 대해 적극적으로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48]

2003년 3월 29일 야쿠르트전 수비 도중 왼쪽 내복사근 부상(전치 3주)으로 4월 2일 1군 엔트리에서 말소되었다.[49] 시즌 막판에는 오른쪽 허벅지 통증까지 겹쳐 결장 기간이 길어졌고, 시즌 후에는 야구 협약 상한선을 넘는 33% 연봉 삭감을 받아들여 1억에 계약했다.[49] 한편, 같은 해 7월 야마모토 고지 감독의 연임이 결정되었을 때 마쓰다 하지메 구단주가 차기 감독 후보로 노무라를 언급하기도 했다.

2004년 1월, 구로다 히로키와 함께 미국 애리조나에서 자율 훈련을 하며 부상 방지를 위한 심부 근육 강화와 고관절 유연성 향상에 힘썼다.[50] 그러나 6월 19일 야쿠르트전에서 3루 땅볼 수비 중 오른쪽 무릎을 다쳐 또다시 1군 엔트리에서 말소되는 등 부상 악령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연말에는 연봉 동결로 계약했다.[51]

2005년에는 나이로 인한 체력 저하와 수비 부담을 줄이기 위해 1루수에도 도전하기 시작했으며, 캠프 연습 경기에서는 포수 마스크를 쓰기도 했다. 1월부터 통산 2000안타 달성에 대한 주변의 기대가 높아졌다. 5월에는 고향인 오이타현 사이키시 내 6곳[52]과 소고 백화점 히로시마점에 카운트다운 보드가 설치되었고,[53] 6월에는 히로시마 가스 인포메이션 플라자에서 입단 이후의 발자취를 돌아보는 사진전이 열렸다.[54] 2000안타까지 4개를 남겨둔 6월 21일부터의 홈 6연전 기간에는 사이키시 오테마에 공원에서 250인치 야외 스크린을 통한 퍼블릭 뷰잉이 실시되었다.[54] 마침내 6월 23일 야쿠르트전(히로시마 시민 구장) 4회말, 가와시마 료를 상대로 통산 2000안타를 달성했다. 이는 도토 대학 야구 연맹 출신 선수로는 사상 최초의 기록이었다.[55] 이를 기념하여 히로시마현으로부터 현민 영예상이 수여되었고,[55] 히로시마 전철에서는 기념 파세오 카드를 발행했다.[56] 이후 대타 요원으로 출전하는 빈도가 높아졌고, 9월 16일 시즌 종료 후 현역 은퇴를 공식 발표했다. 시즌 최종전인 10월 12일 요코하마 베이스타스전이 은퇴 경기로 치러졌으며, 만원 관중에게 노무라의 등번호 '7'이 새겨진 포스터가 배포되었다. 은퇴 경기에서는 1번 유격수로 선발 출전했다가 경기 도중 대학 시절 수비 경험이 있는 중견수로 포지션을 옮기기도 했다.[57] 은퇴식 연설에서는 "오늘 모인 아이들아, 야구는 좋은 것이다. 야구는 재밌다!"라는 말을 남겼다.[58] 구단은 등번호 '7'을 영구 결번으로 지정할 것을 제안했지만 노무라 본인이 사양하여, '7번에 어울리는 선수가 나올 때까지 영구 결번 보류' 상태가 되었다.[59] 이후 2013년부터 도바야시 쇼타가 등번호 7번을 물려받았다. 또한 구단 수뇌부는 이 시점부터 2009년 마쓰다 스타디움 개장에 맞춰 노무라를 감독으로 영입할 방침을 세웠던 것으로 알려졌다.
플레이 스타일

  • 타격: 최다 안타 3회, 최다 득점 2회, 트리플 쓰리, 통산 2000안타를 달성했으며, 특히 현역 전반기에는 히로시마의 리드오프로서 맹활약했다. 신장 176cm, 체중 75kg으로 특별히 체격 조건이 뛰어나지는 않았지만, 꾸준한 훈련을 통한 근력 강화로 거포형 선수들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트리플 쓰리를 달성하며 높은 평가를 받았다. 유격수로서 10년 이상 활약하며 기록한 통산 타율 .293은 1,000타석 이상 기준 센트럴 리그 유격수 최고 기록(2004년 당시)으로, 역사상 손꼽히는 강타 유격수였다. 과감한 타격 스타일을 가졌으며, 1번 타자로 기용되어도 초구부터 적극적으로 스트라이크를 공략하는 경향이 있었다.[82] 심야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중계를 빼놓지 않고 시청할 정도로 '메이저리그 마니아'였으며, 역동적인 플레이를 의식하여 3루타 상황에서의 크로스 플레이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고등학교 입학과 동시에 빠른 발을 살리기 위해 양손 타자가 되었지만, 프로 입단 후에는 좌타에 전념했다. 배트는 미즈노 테크닉스의 나와 타미오가 제작한 것을 사용했다.[83]
  • 주루: 뛰어난 발을 가진 선수로 유명했다. 대학 시절 동일본 대학 야구 리그 최다 도루 기록을 세웠고, 4학년 봄에는 도루 성공률 100%를 기록하는 등[84] 프로 입단 전부터 주루 능력이 뛰어났다. 4학년 때는 베이스 1주에 13.8초라는 좋은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프로 입단 후에도 1989년 4월 12일 첫 도루를 기록했고, 5월 말까지 10번의 도루 시도 중 8번을 성공시키는 등[85] 일찌감치 실력을 발휘했다. 프로 통산 3번의 도루왕을 차지했다. 입단 후 10년간 234도루, 42개의 3루타를 기록했으나, 현역 후반기에는 잦은 발 부상으로 주력이 떨어져 대주자로 교체되는 경우가 많아졌다.
  • 수비: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는 투수였으나, 대학에서 외야수로 전향했고 프로 2년차부터 내야수가 되었다. 플레이에서 동료와의 연계를 중시했으며, 특히 프로 1년차에는 쇼다 고조와의 연계 플레이를 집중적으로 연습했다. 타구가 많이 오고 병살 플레이나 중계 플레이에 자주 관여하는 유격수 포지션 특성상, 타격 순간을 제외하고는 항상 360도 전방위에 주의를 기울였다.[86] 과거 히로시마의 홈구장이었던 히로시마 시민 구장은 흙으로 된 그라운드였기 때문에 불규칙 바운드가 많아, 평정심을 유지하고 허리를 낮춰 확실하게 포구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스스로 어깨가 강하지 않다고 판단하여 송구를 과제로 삼았고, 대시 등으로 이를 보완하려 노력했다. 반드시 수비의 명수라는 평가는 받지 못했지만,[87] 1990년대 전반에는 레인지 팩터에서 리그 톱 수치를 여러 해 기록(1992년, 1994년, 1995년)하는 등 타구를 아웃으로 만드는 능력은 높았다. 글러브에 대해서는 프로 2년 차부터 같은 글러브를 7년이나 사용할 정도로 강한 고집을 가지고 있었고, 같은 타입의 글러브를 사용한 후배로는 이오 스케미츠, 카이 마사토, 이시바시 나오토 등이 있다. 이 노무라의 글러브를 베이스로 한 글러브를 에토와 히가시데가 사용했고, 기무라 타쿠야도 노무라의 글러브를 참고하고 있었다.

4. 2. 지도자 시절

2006년부터 2009년까지는 히로시마 TV 방송, 닛폰 TV, 스포츠 닛폰에서 야구 해설위원으로 활동했다.

2010년부터 11년 연속 B클래스(4위 이하)에 머물던 히로시마 도요 카프의 감독으로 취임했다. 감독이나 코치 경력이 전무했음에도 불구하고, NPB 감독으로서는 비교적 저렴한 연봉으로 계약했다.[64] 이는 전임 감독 마티 브라운의 연봉(40만달러)[65]를 크게 웃도는 금액이었다. 취임 기자회견에서 노무라는 "우승을 목표로 합니다. 선수들도 그런 마음가짐으로, A클래스를 목표로 한다는 말은 그만둬 주십시오"라고 포부를 밝혔고,[66] 히로시마 시내 병원에서 열린 강연회에서는 "우승하면 '평범한 일을 했을 뿐입니다'라고 말할 생각입니다"[67]라고 선언하며 강한 의지를 보였다.

감독 부임 첫 해인 2010년, 노무라는 이전 시즌까지 부진했던 범 영심, 광세 준과 시범 경기에서 활약한 아마야 소이치로, 그리고 자신이 미국 코치 연수 시절 눈여겨보았던 저스틴 휴버를 개막전부터 주전으로 기용했다. 범 영심과 광세 준은 이 해 최고의 성적을 거두었으나, 장타력을 기대했던 아마야와 휴버는 부진했다.[68] 이 해 히로시마의 선발 라인업은 95가지에 달할 정도로 시즌 내내 타순을 고정하지 못했다. 팀 희생 번트 수는 구단 역사상 최다인 140개를 기록했고, 팀 도루 수도 지난 15년간 가장 많은 119개를 기록하며 기동력이 향상되었다. 경기당 평균 득점은 5년 만에 3점대를 벗어나 4.1점을 기록했다. 수비 면에서도 전년도 리그 최하위였던 팀 실책 수가 100개에서 82개(리그 3위)로 줄어드는 개선을 보였다.[69]

하지만 투수진에서는 문제가 많았다. 에이스였던 콜비 루이스가 전년도 12월 갑작스럽게 팀을 떠났고, 개막 전 캠프부터 시즌 초반까지 오타케 히로시, 요코야마 류지, 마이크 슐츠, 나가카와 카츠히로 등 주력 투수들의 부상이 이어졌다. 특히 오타케의 경우, 부상 직후 신중하게 관리했어야 함에도 복귀를 서두르다 재부상을 당하게 하는 등 선수 컨디션 관리 능력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었다.[70] 불펜 투수 기용 방식에 대해서도 의문이 제기되었다.[71] 마에다 켄타가 팀 역사상 최초로 투수 부문 3관왕을 달성하는[72] 뛰어난 활약을 펼쳤음에도 불구하고, 팀 평균자책점은 전년도 3.59에서 5년 만에 4점대 후반인 4.80으로 크게 나빠졌다. 마에다를 제외한 팀 평균자책점은 5.33에 달했으며, 이는 팀 역사상 가장 큰 평균자책점 악화 폭(1.21)이었다. 마찬가지로 팀 실점은 162점 증가한 737점, 사사구는 137개 증가한 524개, 피홈런은 54개 증가한 171개로 모두 역대 최대 증가폭을 기록하며 "구단 사상 최악의 투수력 후퇴"라는 평가를 받았다.[73]

결국 2010년 시즌 최종 성적은 팀 역사상 두 번째로 많은 84패(58승)를 기록하며 2년 연속 리그 5위에 머물렀다. 그러나 노무라는 시즌 후 가을 캠프에서 부진했던 투수진에게 강도 높은 훈련을 예고하며 다음 시즌을 향한 의지를 보였다.[74] 12월 7일에는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 후보자 명부 선수 부문에 이름이 올랐다.[75]

2011년에는 9월 초까지 A클래스(3위 이내) 경쟁을 벌였으나, 이후 급격히 부진에 빠지며 전년과 같은 리그 5위로 시즌을 마감했다. 특히 센트럴·퍼시픽 교류전에서는 10연패를 당했고, 이 기간 동안 50이닝 연속 무득점이라는 교류전 최악의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6월 26일 중일 드래곤즈전에서는 3회말 나카무라 쿄헤이의 땅볼 판정에 항의하다 심판에게 폭력을 행사하여 퇴장당했다.[76] 다음 날, 가토 료조 커미셔너로부터 2경기 출장 정지 처분을 받았고, 이 기간 동안에는 타격 코치였던 다카 노부히로가 감독 대행을 맡았다.

2012년에는 시즌 전반기를 한신의 부진 덕에 1997년 이후 15년 만에 A클래스인 3위로 마쳤다. 하지만 9월 들어 8연패를 포함해 6승 17패 1무로 크게 부진하며 야쿠르트와의 3위 경쟁에서 밀려나 최종 순위는 4위를 기록, 15년 연속 B클래스에 머물렀다.

2013년에도 계속해서 팀을 이끌었고,[77] 4년 연속으로 정규 시즌에서 패수가 승수보다 많았지만, 1997년 이후 16년 만에 팀을 A클래스인 3위로 이끌며 구단 역사상 처음으로 클라이맥스 시리즈 진출을 달성했다. 그러나 클라이맥스 시리즈 파이널 스테이지에서 거인에게 패배하며 일본 시리즈 진출에는 실패했다.

2014년에는 2년 연속으로 거인, 한신과 우승 경쟁을 벌였다. 9월 26일 히로시마가 한신과의 원정 경기(고시엔)에서 패배하며 거인의 우승이 확정되었지만, 동시에 히로시마는 2년 연속 클라이맥스 시리즈[78] 진출을 확정했다. 이후 한신과 치열한 2위 다툼을 벌였으나, 시즌 최종전인 10월 6일 거인과의 홈 경기(마쓰다 스타디움)에서 패배하며 3위로 시즌을 마감했다.[79] 10월 8일, 노무라는 구단에 감독직 사임 의사를 밝혔고 이는 수용되었다. 그는 진출이 확정된 클라이맥스 시리즈까지만 팀을 지휘하고 감독직에서 물러났다.[80] 이 해 기록한 74승은 구단 역사상 두 번째로 많은 승수였다.

노무라는 선수 시절 경험을 바탕으로 히로시마의 전통인 "달리는 빨간 모자 야구"를 표방하며, 발 빠른 선수들을 적극적으로 상위 타선에 배치하여 팀 도루 수를 크게 늘렸다. 또한 브래드 엘드레드 등 외국인 선수들과 적극적으로 소통하려는 자세[88]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상대 투수의 주력 투구 팔(오른손/왼손)에 따라 타순을 크게 바꾸는 소위 '좌우놀이' 또는 '좌우병' 전술은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89] 이러한 경향은 예고 선발 제도가 도입된 2012년 이후 더욱 두드러졌다. 상대 투수와의 상성이나 자팀 선수들의 컨디션과 관계없이 이러한 작전을 고수했기 때문에 타순이 너무 자주 바뀌고 고정되지 않는다는 비판이 많았다.

5. 인물

'''노무라 겐지로'''(野村 謙二郎|노무라 겐지로일본어, 1966년 9월 19일 ~ )는 오이타현 사이키시 출신의 전 프로 야구 선수(내야수, 우투좌타), 야구 해설가·야구 평론가이다. 일본 프로 야구 명구회 부이사장[1], 히로시마 대학 스포츠센터 객원교수를 역임했다.[2]

1988년 서울 올림픽 야구 은메달리스트이다.

6. 수상 및 타이틀 경력

선수 시절 동안 여러 차례 도루왕최다 안타 타이틀을 차지했으며, 베스트 나인과 골든 글러브상을 수상하는 등 공격, 수비, 주루 모든 면에서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

1990년 첫 도루왕 타이틀을 획득했고[20], 이듬해인 1991년에는 2년 연속 도루왕과 함께 첫 최다 안타, 첫 베스트 나인에 선정되며 팀의 리그 우승에 크게 기여했다.[21] 일본 시리즈에서는 팀 내 최고 타율을 기록하며 우수 선수상을 받기도 했다. 1993년에는 4월 월간 MVP로 선정되었다.[25]

1994년에는 통산 3번째 도루왕과 2번째 최다 안타 타이틀(공식 타이틀 제정은 이 해부터)을 동시에 석권했다. 1995년은 선수 경력의 정점으로, 5월 월간 MVP 수상에 이어 시즌 타율 .315, 32홈런, 30도루를 기록하며 역대 6번째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하는 위업을 세웠다. 이 해 최다 안타 타이틀도 차지했으며, 수비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아 첫 골든 글러브상과 베스트 나인을 동시에 수상했다.[34] 또한 IBM 플레이어 오브 더 이어상 등 다수의 상을 받았다. 1996년에도 베스트 나인에 선정되었다.

이 외에도 여러 차례 우수 JCB·MEP상, JA 전농 Go·Go상 등을 수상했으며, 2005년 은퇴 시에는 센트럴 리그 회장 특별 표창과 히로시마현 현민 명예상을 받았다.[55] 1996년에는 고향인 오이타현 사에키시로부터 시민 영예상을 받기도 했다.

6. 1. 타이틀


  • 최다 안타: 3회 (1991년, 1994년, 1995년) ※공식 타이틀 제정은 1994년.
  • 도루왕: 3회 (1990년, 1991년, 1994년)

6. 2. 수상


  • 베스트 나인: 3회 (1991년, 1995년, 1996년)
  • 골든 글러브상: 1회 (1995년)
  • 일본 시리즈 우수 선수상: 1회 (1991년)
  • 월간 MVP: 2회 (1993년 4월, 1995년 5월)
  • 우수 JCB·MEP상: 2회 (1994년, 1995년)
  • JA 전농 Go·Go상: 1회 (호주루상: 2004년 4월)
  • IBM 플레이어오브더이어상: 1회 (1995년)
  • 센트럴 리그 회장 특별 표창: 1회 (2005년)
  • 오이타현 사이키 시민 영예상 (1996년 3월 15일)
  • 히로시마현민 명예상 (2005년)

7. 주요 기록

노무라 겐지로는 히로시마 도요 카프에서 활약하며 뛰어난 기록을 남긴 선수이다. 통산 1927경기에 출전하여 2020안타, 169홈런, 765타점, 250도루, 타율 .285를 기록했다.

주요 수상 경력으로는 최다 안타 2회(1994년, 1995년), 도루왕 3회(1990년, 1991년, 1994년), 골든 글러브상 1회(1995년, 유격수 부문), 베스트 나인 3회(1991년, 1995년, 1996년, 유격수 부문) 등이 있다. 특히 1995년에는 타율 .315, 32홈런, 30도루를 기록하며 일본 프로 야구 역사상 6번째로 트리플 쓰리를 달성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2005년 6월 23일에는 개인 통산 2000안타를 달성했으며, 이를 기념하여 히로시마현으로부터 현민 영예상을 받았다.[55] 같은 해 10월 12일 은퇴 경기를 치렀다.

7. 1. 첫 기록


  • 첫 출장: 1989년 4월 9일, 대 한신 타이거스 2차전(히로시마 시민 구장), 7회말 로드 알렌(로드 알렌)의 대주자로 출전
  • 첫 도루: 1989년 4월 12일, 대 요코하마 다이요 웨일스 2차전(요코하마 스타디움), 7회초 2루 도루 (투수: 가케하타 미쓰노리, 포수: 이치카와 가즈마사)
  • 첫 선발 출장: 1989년 5월 4일, 대 야쿠르트 스왈로스 6차전(히로시마 시민 구장), 7번·좌익수로 선발 출장
  • 첫 안타·첫 타점: 같은 경기 6회말 나카모토 시게키로부터 중전 적시타
  • 첫 홈런: 1990년 4월 15일, 대 요미우리 자이언츠 2차전(히로시마 시민 구장), 3회말 미야모토 가즈토모로부터 우월 솔로 홈런

7. 2. 기록 달성 경력

1990년 33개의 도루를 기록하며 자신의 첫 타이틀인 도루왕을 차지했다. 1991년에는 31도루로 2년 연속 도루왕에 올랐고, 170안타로 최다 안타 타이틀도 획득했다. 이 해 타율 .324(리그 4위)를 기록하며 처음으로 베스트 나인(유격수 부문)에 선정되었고, 팀의 센트럴 리그 우승에 기여했다.[21] 일본 시리즈에서는 팀은 패배했지만 타율 .333을 기록하며 우수 선수로 선정되었다.

1994년에는 169안타로 두 번째 최다 안타 타이틀과 37도루로 세 번째 도루왕을 동시에 석권했다.

1995년에는 타율 .315, 32홈런, 30도루를 기록하며 일본 프로 야구 역사상 6번째로 트리플 쓰리를 달성했다. 같은 해 9월 22일 요코하마 베이스타스전에서 개인 통산 1000안타를 달성했는데, 이는 857경기 만의 기록으로 당시 역대 5위에 해당하는 빠른 속도였다.[101] 수비에서도 좋은 평가를 받아 처음으로 골든 글러브상(유격수 부문)을 수상했다.

1999년 5월 19일 한신 타이거스전에서는 통산 1500안타를 달성했다. 1289경기 만의 달성으로, 당시 역대 4위에 해당하는 빠른 기록이었다.[102]

2005년 6월 23일 히로시마 시민 구장에서 열린 야쿠르트 스왈로스전에서 가와시마 료를 상대로 안타를 기록하며, 프로 야구 통산 33번째이자 대학·사회인 출신 선수로는 15번째로 2000안타를 달성했다.[55] 이 공로로 히로시마현으로부터 현민 영예상을 받았다.[55] 같은 해 7월 1일에는 통산 250도루(역대 37번째)를 기록했다.

통산 기록은 2020안타, 169홈런, 765타점, 250도루이다.

=== 첫 기록 ===

기록날짜상대팀장소상세 내용
첫 출전1989년 4월 9일한신 타이거스히로시마 시민 구장(초대)7회말 로드 아렌의 대주자로 출전
첫 도루1989년 4월 12일요코하마 다이요 웨일스요코하마 스타디움7회초 2루 도루 (투수: 欠端光則, 포수: 市川和正)
첫 선발 출전1989년 5월 4일야쿠르트 스왈로스히로시마 시민 구장7번·좌익수로 선발 출전
첫 안타·첫 타점1989년 5월 4일야쿠르트 스왈로스히로시마 시민 구장6회말 中本茂樹로부터 중전 적시타
첫 홈런1990년 4월 15일요미우리 자이언츠히로시마 시민 구장3회말 宮本和知로부터 우월 솔로 홈런



=== 주요 기록 ===

기록날짜상대팀장소상세 내용비고
통산 1000안타1995년 9월 22일요코하마 베이스타스요코하마 스타디움5회초 데니 도모리로부터 우월 2점 홈런역대 181번째 (857경기 달성, 당시 역대 5위, 현재 9위)[101]
통산 100홈런1996년 5월 28일주니치 드래건스나고야 구장8회초 야마모토 마사로부터 우월 솔로 홈런역대 187번째
통산 1000경기 출장1997년 4월 16일요미우리 자이언츠히로시마 시민 구장1번·유격수로 선발 출장역대 340번째
통산 1500안타1999년 5월 19일한신 타이거스요나고 시민 구장5회말 이가와 게이로부터 좌전 안타역대 77번째 (1289경기 달성, 당시 역대 4위, 현재 5위)[102]
통산 1500경기 출장2001년 8월 26일한신 타이거스한신 고시엔 구장6번·3루수로 선발 출장역대 133번째
통산 150홈런2001년 10월 6일주니치 드래건스히로시마 시민 구장4회말 오가사와라 다카시로부터 중월 솔로 홈런역대 119번째
통산 300 2루타2005년 4월 1일요미우리 자이언츠도쿄 돔9회초 사토 히로시로부터 우중간 2루타역대 42번째
통산 2000안타2005년 6월 23일야쿠르트 스왈로스히로시마 시민 구장4회말 가와시마 료로부터 좌전 안타역대 33번째
통산 250도루2005년 7월 1일요미우리 자이언츠도쿄 돔8회초 2루 도루 (투수: 다카하시 히사노리, 포수: 아베 신노스케)역대 37번째



=== 기타 기록 ===

기록횟수/내용비고
트리플 쓰리1회 (1995년)타율 .315, 32홈런, 30도루
시즌 150안타 이상7회 (1991년, 1992년, 1994년 - 1998년)역대 4위 타이
5년 연속 시즌 150안타 이상1994년 - 1998년역대 5위 타이
4년 연속 리그 최다 내야 안타1991년 - 1994년
통산 선두타자 홈런21개역대 10위
통산 선두타자 초구 홈런7개역대 1위
시즌 선두타자 초구 홈런3개 (1997년)역대 2위
2경기 연속 선두타자 초구 홈런1997년 8월 21일 - 8월 22일
1경기 3희생플라이1996년 6월 30일일본 프로 야구 타이 기록
3경기 연속 3루타1990년 4월 8일 - 4월 11일
연속 경기 안타20경기 (1994년 8월 3일 - 8월 25일)
연속 경기 득점10경기 (1995년 5월 13일 - 5월 26일)
올스타 게임 출전8회 (1990년, 1991년, 1993년, 1994년, 1995년, 1996년, 1997년, 1998년)



=== 수상 내역 ===

수상명횟수연도/부문
최다 안타2회1994년, 1995년
도루왕3회1990년, 1991년, 1994년
골든 글러브상1회1995년 (유격수 부문)
베스트 나인3회1991년, 1995년, 1996년 (유격수 부문)
일본 시리즈 우수 선수상1회1991년
월간 MVP2회1993년 4월, 1995년 5월
올스타전 우수 선수상1회1993년 2차전
히로시마현 현민 영예상1회2005년


7. 3. 기타

'''첫 기록'''

'''주요 기록'''

'''기타 기록'''

기록횟수/내용비고
트리플 쓰리1회1995년
시즌 150안타 이상7회1991년, 1992년, 1994년 ~ 1998년 (역대 4위 타이)
5년 연속 시즌 150안타 이상-1994년 ~ 1998년 (역대 5위 타이)
4년 연속 리그 최다 내야 안타-1991년 ~ 1994년
통산 첫회 선두 타자 홈런21개1회초 6개, 1회말 15개 (역대 9위)
통산 첫회 선두 타자 초구 홈런7개1회초 3개, 1회말 4개 (역대 1위)
시즌 첫회 선두 타자 초구 홈런3개1990년 (1회초 2개, 1회말 1개) (역대 2위)
2경기 연속 첫회 선두 타자 홈런-1997년 8월 21일 ~ 8월 22일
1경기 3개 희생 플라이-1996년 6월 30일 (일본 타이 기록)
3경기 연속 3루타-1990년 4월 8일 ~ 4월 11일
20경기 연속 안타-1994년 8월 3일 ~ 8월 25일
10경기 연속 득점-1995년 5월 13일 ~ 5월 26일
올스타전 출장8회1990년, 1991년, 1993년, 1994년, 1995년, 1996년, 1997년, 1998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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